신의 저항군(LRA) 에게서 풀려난 콩고의 10대 소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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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Celine Schmitt

출처: http://www.unhcr.org/4f88330d9.html



둔구(Dungu), 콩고 민주공화국 - 한 조용하고 평화로운 빵집이 있습니다. 빵집에 있는 한 젊은 여성이 오븐에서 황금빛 바게트를 꺼내 바닥에서 놀고 있는 자신의 아이에게 건네줍니다.

하지만 이러한 광경의 뒤엔 17세인 Rose*가 거의 2년간 우간다의 잔혹한 저항 단체인 '신의 저항군 (Lord's Resistance Army, LRA)'에게 포로로 붙잡혀 겪었던 고통과 학대가 숨어있습니다. 그리고 Rose의 15개월 된 남자아이의 아버지는 신의 저항군의 전사입니다. 3년 전에 신의 저항군의 지휘관은 콩고 민주공화국의 동북부에 있는 Rose의 집에서 Rose를 유괴한 뒤 아이의 아버지인 저항군 군사에게 Rose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북동쪽콩고.jpg


Rose와 다른 소녀들이 반가디(Bangadi)의 소도시 근처의 들판에서 일을 하던 중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LRA 전사들에게 유괴되었습니다. 당시 Rose와 소녀들은 14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Rose는 2010년 말에 우간다 국군에 의해 구조될 때까지 1년 8개월을 LRA 전사들과 지냈습니다.


현재 Rose는 자신이 일하는 빵집이 있는 둔구의 마을에서 새 삶을 시작하려 합니다. Rose가 일하고 있는 빵집은 DWP가 운영하고 있습니다. DWP는 UNHCR(the Office of the United Nation High Commissioner of Refugee)의 지원을 받는 단체입니다.


하지만 LRA의 활동으로 인해 계속해서 이 지역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작년 말부터 지금까지 4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격을 피해 집으로부터 도망쳤으며, 콩고민주공화국 북서부의 오리엔탈(Orientale) 주에선 2008년 이후 총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쫓겨났습니다. Rose가 유엔난민기구에 밝힌 바는 이와 같습니다.


Rose의 이야기

“우리가 반가디에서 35km 떨어진 신의 저항군 캠프에 도착했을 때 저항군 지휘자가 우리에게 강제로 남편을 고르게 하고, 남편과 그 날부터 매일 성관계를 갖도록 했어요. 불운하게도 제 남편은 성병을 갖고 있었고 제게도 전염이 되었어요. 2주 뒤에 저는 아랫배에 끔찍한 고통을 느꼈어요. 지휘관이 저에게 약을 주어 통증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병을 고치진 못했어요. 저는 2주간 성관계를 갖지 말아야 한다고 들었지만, 한달 후에 제 남편은 저에게 잠자리를 강요했어요. 제 남편은 제가 거부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했어요. (Rose는 아직도 성 병 때문에 약을 복용하고 있습니다.)


“그 오지에는 우리말고도 다른 많은 소녀들이 있었어요. 우리는 저항군들의 부인이었지만 동시에 강제로 짐을 나르는 짐꾼이기도 했죠. 저항군들은 매일 다른 곳으로 이동했고 우리는 저항군들의 물건을 날라야 했어요. 우리는 높이 자란 풀 때문에 정강이 보호대를 받았지만 여전히 아팠어요. 매일 밤 우리는 강제로 남편과 성관계를 가졌어요. 우리가 일하길 거부하거나 반항하려고 하면 저항군들은 우릴 때렸어요. 저항군들은 도망치려던 한 사람을 죽였어요."


"2010년의 어느 날엔 전사들이 타필리(Tapili) 마을을 습격하려고 떠났어요. 그때 바로 우간다 국군이 와서 저와 다른 아이들을 구해주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제가 임신했다는 걸 몰랐죠. 저는 어릴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둔구로 떠나있었기 때문에 삼촌과 반가디에 살았는데, 우간다 국군은 저를 반가디에 데려다 주었어요. 저와 함께 유괴되었던 소녀는 돌아오지 못했어요. 신의 저항군이 소녀를 우간다로 데려갔다고 들었어요."


"제가 자유의 몸이 된 후로 저는 정신적 충격 때문에 다시 그 오지로 돌아가서 신의 저항군과 살까 생각했어요. 저는 모든 사람이 무서웠어요. 가끔은 제가 몇 시간 혹은 하루 동안 사라져서 사람들이 절 찾아 다니기도 했어요. 저는 도움을 얻어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끔찍했던 시련을 잊기 시작했죠. COOPI (이탈리아의 원조기구인 국제 코페라지오네)가 정기적으로 저를 찾아와서 옷을 주었어요.


"제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강도를 낳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낙태를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교회와 제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들었고 낙태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죠. 그리고 하루는 적십자사가 와서 저를 둔구로 데려가 엄마를 만나게 해주었어요. 하지만 엄마는 저를 거부했어요. 제가 유괴됐을 때 저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저는 처음엔 수양가족과 살다가 지금은 삼촌과 살지만 삼촌은 저를 돌봐주지 않아요. 저는 이틀간 아무것도 먹지 못할 때도 있어요."


"임신이라는 것이 정말 복잡한 일이었고 저는 아이를 기를 힘도, 모유도 없었어요. 저는 그 아이를 처음에는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 가 착한 아이이고 제가 아이를 사랑하게 됐다는 걸 깨달았죠... 제 아이는 태어난 후 굉장히 아팠고 저는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 저는 그저 병원의 간호사들이 너그러이 아이를 돌봐주기만을 바랄 수 밖에 없었어요"


"하루는 제가 둔구에서 석탄을 팔고 있을 때 한 수녀님이 저에게 와서 말을 걸기 시작했어요. 수녀님의 이름은 Sister Angelique였어요. 수녀님은 저를 보호해주기 시작했고, 재활과 성장에 대한 지원을 해주는 기관에 저를 소개해주었어요(Dynamic Women for Peace가 운영하는 곳입니다).


"저는 그 기관에서 빵을 굽는 방법을 배웠고 현재는 일주일에 서너 번 빵을 구워 둔구의 길거리에서 팔고 있어요. 저는 한 주에 8천에서 9천 콩고 프랑(CDF)을 벌 수 있지만(8~9달러(USD)) 이 일은 힘들어요. 빵을 팔기 위해서는 도시를 따라 꽤 오래 걸어야 하기 때문이죠. 제게 문제가 생기면, 수녀님을 찾아갑니다. 수녀님은 제가 밀가루가 부족하면 밀가루를 얻도록 도와주는 등 많은 도움을 줍니다. . ."


"제 꿈은 재봉틀을 살만큼 충분한 돈을 모으는 거에요. 저는 좀 더 안정적인 직업과 더 나은 미래를 갖고 싶어요. 예전에 재활 기관에서 바느질 하는 법을 배웠어요, 이 기술을 독립하는 데 사용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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