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기근: 세계 최대 난민촌 다답(Dadaab)에서

Global Poverty Wiki by GP3 Korea
이동: 둘러보기, 찾기

저자: Sally Williams

출처: http://bit.ly/T9hH9q


아프리카의 기근: 세계에서 가장 큰 난민촌인 다답(Dadaab) 안에서

100명이 넘는 소말리아 피난민들이 케냐로 들어옴으로써, 지금 다답 난민촌은 집으로 돌아갈 희망이 거의 없는 50만 주민들이 살고 있는 하나의 도시입니다.


다답난민.png 사진 1/4 소말리아의 한 어머니는 세 개의 다답 지역 중 하나인 이포(Ifo)의 안내실에 도착했습니다. 사진 : Dominic Nahr


다음의 일지는 2011년 9월 17일 AM 9:00 Sally Williams에 의해 쓰여짐


Adbi 의 마지막 소가 죽었습니다. 그는 그의 부인인 Sarura 와 그의 네 아이들에게 떠나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바쿨(Bakool)과 소말리아에서 몇 개의 옷과 요리도구를 싸서 세계에서 가장 큰 난민촌인, 남서쪽으로 200마일을 걸어야 하는 케냐의 가장자리에 있는 다답으로 향했습니다.


28일 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한줌의 쌀과 조금의 홍차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난민촌 입구의 줄에서 그들을 만났습니다. “4년 전에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습니다.”라고 Adbi가 그의 아내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녀는 통통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내가 결혼했던 당시의 그녀가 아닙니다. Sarura는 날씬한 팔다리와 계란형 얼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굶주림은 그녀를 구부정하고 핼쑥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이들 또한 왜소하고 펑퍼짐하며 늙어 보입니다.”

완전한 성인인 Abdi 는 대부분의 성인 남성들이 남은 것을 지키기 위해 무법지대인 소말리아에 남아있든지 이미 죽음을 당했든지 둘 중 하나기 때문에 이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성인 남성입니다. Abdi는 가난은 사라지고 그의 늙은 아내가 되돌아 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떠날 때, 그들은 닛산 트럭의 천막 뚜껑에 실려져 있었고, 지붕에는 새로운 냄비들과 비상식량들이 묶여있습니다. 3개월 전에 먼저 캠프에 도착한 Abdi의 형제가 변두리에 사는 그들을 발견했습니다. 트럭의 주인은 산타클로스의 수염을 가진 마을의 노인이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다답에서 듣는 희망적인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다른 이야기는 Sadia의 이야기 입니다. 그녀는 앞잡이 군대들 사이에서의 끔찍한 총격전 중 모가디슈(Mogadisu)근처의 집에서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녀의 부모님은 죽었고, 그녀의 남편은 실종되었습니다. Sadia는 9명의 아이들과 몇몇의 이웃들과 함께 15일 동안 걸었습니다. 6일째 되는 날, 그들은 폭행을 당했습니다. 2명의 여성이 강간을 당했습니다. Sadia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도망가라고 했고, 강간을 당한 여성들은 걸을 수 조차 없어서 Sadia는 그 여성들을 함께 데려갈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비록 Sadia가 나와 반대편에 앉아 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나를 바라볼 수 없습니다. Sadia는 기억들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돌아섰고, 너무 두려워서 계속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통행금지 시간인 6시를 딱 맞출 시간만 남았고, 세이브더칠드런(Save the Children)의 어린이들을 위한 공간에 잠시 들렀습니다. 이곳은 타이어그네와 마스크를 만드는 작업장이 집 뒤 놀이터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용한 방 안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동물과 같은 아이들이 직접 만든 예술작품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나는 하이에나 공예품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습니다. “이 작품들은 아이들이 여행을 통해 본 것들입니다.”라고 예쁜 케냐 여성이 활짝 웃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선반을 둘러 보았고 많은 뱀들과 몇 마리 사자들을 본 딴 공예품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돌출된 둔부와 큰 가슴을 가진 나체의 여성 앞에 멈춰 섰습니다. ‘아! 이 여성은 성폭행을 당했구나’ 이 공예품을 만든, 피해자인 아이는 아마 7세였을 것입니다.


다답으로의 여행은 죽음의 계곡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소녀들은 초등학교 저학년 이더라도 강간을 당합니다. “강간 피해의 3분의 1은 남자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일어납니다.”라고 소년보호 담당자인 Camilla Jones가 말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보고된 숫자에 불과합니다.” 소말리아 여성들과 아이들에게 강간의 대가는 수치심입니다. “우리는 자긍심을 기르는데 힘써야 합니다.”라고 도우미가 말했습니다. 영양실조는 4주에서 6주면 회복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의심쩍어 할지도 모르지만, 감정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들은 회복되지 않습니다.


이번 3월과 4월에는 동부 아프리카에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작년 10월과 11월에도 같은 상황이 발생했었습니다. 사실상 과거 10년 전부 가뭄이 있었습니다. 가뭄은 케냐,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세 나라에서 주로 발생했고, 세 나라가 만나는 삼각형의 건조지역을 가로지릅니다. 8월초에는 유엔식량농업기구(FAO: 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에서 60년 만에 가장 심한 가뭄이라고 발표했으며 굶주림으로 인해 위험에 처한 인구는 1,240만 명이나 된다고 했습니다.


이 일은 1984년에 에티오피아에서 기근으로 인해 수백만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일을 떠오르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예비경고 시스템, 'wonder snack’ Plumpy’nut 과 같은 기근에 대한 정밀한 치료, 그리고 케냐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도와준 국제개발부의 8,720만 파운드(GBP)의 기아안전망프로젝트(Hunger Safety Net Project)와 같은 계획 없었다면 현재도 사망자 수가 당시와 같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구호가 효율적으로 지원되기 위해서는 제대로 기능을 하는 정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소말리아는 지난 20년 동안 기능을 수행하는 정부가 없었습니다. 해적 행위는 무법국가의 한 가지 증상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슬람 극단주의의 확산입니다. 1990년대 초에, 무리의 족장들끼리의 싸움이 있었습니다. 10년 후에, 이것은 엄격한 이슬람 법을 옹호하는 병사들과 족장들 사이의 투쟁이 되었습니다. 2006년에 더 많은 극우파 이슬람인들의 무장단체인 알카에다(al-Qaeda)조직과 연결된 Al-Sabbab(‘the youth’ 혹은 ‘the lads’)을 조직했습니다. Al-shabaab은 지난 4년간 과도연방정부(TFG: Transitional Federal Government)와 대립하고 있습니다.


다답여인들.png


사진 2/4 소말리아의 여성들이 아이들과 함께 Medecins Sans Frontieres health clinic Dadaab에 참여하기 위해 줄을 서 있습니다. 사진: Dominic Nahr



Al-Shabaab은 이제 소말리아 남부 지역의 대부분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2009년 Al-Shabaab은 식량 원조가 이에 대한 의존을 유발하고 해당 기구가 이슬람의 적이라는 이유로 세계식량프로그램(WFP: World Food Programme)을 비롯한 원조 단체들을 추방하기 시작했습니다(세계식량프로그램이 제공하는 식량 중 60%는 미국에서 받은 것입니다). 그 해 말에, 미국은 해당 프로그램의 기금이 Al-Shabaab의 수중에 들어가게 하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의 일환으로 원조 자금에서 5,000만 달러(USD)를 삭감했습니다.


한편, 작년의 강수량 부족은 식품의 가격을 상승시켰습니다. 정부의 사회적인 안전망과 희소한, 혹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원조로 인해 사람들은 굶주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굶주림은 기아로 변했습니다. 7월 하순, 유엔은 3,200만 명의 사람들이 ‘즉각적인 구명 원조(immediate life-saving assistance)’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위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피난처를 찾아 내몰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은 냉혹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소말리아에는 약 1,500만 명의 사람들이 집을 잃었으며, 그 중 3분의 1은 수도 모가디슈에 있는 수용소에서 살고 있습니다. TFG 부대가 Al-Shabaab을 시작한 8월 12일부터 모가디슈에서 공개적으로 활동을 시작해왔던 몇 되지 않는 원조 단체 중 하나인 Mercy Corps의 중역인 Cassandra Nelson은 “그들은 당신이 보는 어디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무언가에 가까이에 있게 될 희망을 가지고 어딘가에 주저앉지만, 그것은 딱히 가까이에 있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없습니다. 또한 변기도 없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 화장실이나 들어갑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수용소에는 콜레라(세계보건기구에 의하면, 한 병원에서만 최근 181명이 콜레라로 인해 사망하였다고 합니다.)와 홍역이 발생합니다. Nelson은 “45분 동안 나는 3명의 아이들이 그 병원에서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여태껏 보아온 고통 받는 순수한 사람들의 수는 상상 이상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답은 한 때 오지 끝자락에 있는 작은 촌락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케냐의 최 외곽 지역까지 가기 위해서는 회색 사막을 2시간 동안 차로 이동해야 합니다. 이곳은 언제나 도적, 차량 탈취, 그리고 총으로 가득한 황량한 서부 지역이었습니다. 난민 수용소는 1991년에 문을 열었으며, 9만 명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20년이 지난 후, Dadaab은 이제 케냐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로, 거의 50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소말리아 인구의 98%)이 살고 있습니다. 그 중 6,000 명은 처음으로 이 곳에 도착한 사람들의 손자인 3세대들입니다.


저는 수용소에서 길을 따라 20분 동안 걸려서, 철조망으로 둘러 쌓여 있는 접근금지구역인 유엔난민기구 수용소의 사무실에서Moses Mukhwana를 만났습니다. 루터교 복지연맹(LWF: Lutheran Welfare Federation)의 사업의 진행자로서, 그는 UNHCR에서 이 수용소를 관리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다답을 계획 설계하는 것이 그가 할 일이었습니다. 그는 케냐 출신의 40세 남성으로, 교사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LWF에 가입한 것은 작년 4월이지만, 세계 구호를 위해 13년 동안 일해왔습니다. 그는 벼랑 끝에서 요령 있고, 자제력 있지만 열정적인 사람의 모범입니다.


Mukhwana는 “저는 오전 5시부터 전화를 받기 시작합니다. 어떤 때에는 제 사무실을 오후 10시에 나서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자정 넘어서까지 있기도 하죠. 누군가가 침입할 수도 있기 때문에 (because you can break) 그저 문을 닫고 가야만 할 때에도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수용소는 완전히 꽉 차 있다는 것입니다. Mukhwana가 도착했을 때 수용소에는 이미 27만 명의 재소자가 있었으며, 그들 중 13%는 심각한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수용소에는 3만 6,000개라는 너무 적은 숫자의 야외 변소와 4만 개라는 턱없이 부족한 수의 거주지만이 있었습니다. 이 후, 올해 6월과 8월 사이, 그 수는 약 340% 상승하였습니다. 당신이 그래프로 그 비율을 보게 된다면, 숫자가 매년 올라가기만 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2011년 6월에 이르러서는 상승률이 거의 직각으로 치솟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아직도 하루에 1,000만큼 상승하고 있습니다.


Mukhana는 컴퓨터 화면을 가리키며 수용소의 지도를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지도는 가장 오래된 지역인 이포(Ifo.), 하가데라(Hagadera), 그리고 다가할리(Dagahaley) 3개의 하위구역으로 세분화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가데라를 선택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어떻게 이것이 조직되었는가 였습니다. 단지와 구획의 기하학적 패턴은 제게 뉴욕의 그리드 시스템을 연상케 했습니다. 이에 Mukhwana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습니다. 이 획정 방식은 확실히 뉴욕에서 따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각각의 단지는 100개 가구를 포함하고 있으며, 각각의 가구는 5명 내지 6명의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구획은 10 개의 단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문제는 소말리아로 돌아가려는 피난민들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답의 몇 개 구역에서는 황당할 정도로 시민적인 곳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포는 8개의 초등학교와 2개의 중학교, 1개의 성인 교육 센터, 50개의 모스크, 그리고 최소한 150명의 이맘 (imam)이 있습니다. 또한 수용소는 자전거, 비스킷, 분유, 대추야자 열매, 스파게티(소말리아는 이탈리아 인들이 식민화하였습니다.)를 파는 상점들이 모여있는 5개의 ‘시장’을 포함합니다. Mukhwana는 “모든 난민이 가난한 것은 아닙니다. 몇몇 사람들은 여기서 큰 사업을 벌이기 위해 자원을 가지고 오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큰 상점을 운영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대다수의 피난민은 가난한 상태에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수용소 부지는 2008년 8월에 모두 채워졌습니다. 새로이 도착한 사람들은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들어오고 있습니다. Mukhwana는 “수용소는 내부에서부터 커지기 시작했습니다.”라고 합니다. 교실들은 60명에서 120명의 아동을 수용할 수 있도록 확장되었습니다. 작년 10월에 이르러서는 수용소에는 더 이상의 공간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곽 지역에 정착하였습니다. Mukhwana는 “여기 보이는 곳이 그 지역입니다.”라고 하얗고 비어있는 지도를 짚으며 말했습니다. 비공식적인 교도소입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이제 그 곳에 모여있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걸렸습니다. 그 곳의 체제는 그 캠프 자체보다 훨씬 더 열악하고 더러우며, 굴욕적이며 위험합니다. 어떠한 위생도 없습니다. 요리를 하기 위해서 여성들은 장작이 필요하고 만약 그들이 이것을 얻기 위해 미개간지로 가면 그들은 성폭행을 당할 위험에 놓입니다. 몇몇 장기 거주자들은 염소를 가지고 있지만, 최근에 정착한 10만 명은 가뭄으로 가축을 잃었습니다. 캠프 전체를 위한 물은 대형 트럭이 가져다 주는데 농작물은 고사하고 사람들에게도 충분치 못합니다.


1990년대 초, 케냐 정부의 난민들을 다루는 부서는 내무부 사람 1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케냐의 난민들에 대한 책임은 오직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 for Refugees)에 있었습니다. 2006 케냐의 난민법은 30개의 팀으로 구성된 난민부(DRA: Department of Refugee Affairs)의 창립을 이끌었습니다. UNHCR의 대변인 Emmanuel Moiabera는 “이제 이 사무실의 우선순위는 움직임의 일환이 되는 것이지만 정부가 책임자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캠프를 운영하기 위해 UNHCR이 세이브더칠드런(Save the Children), 루터세계연맹(LWF: Lutheran World Federation)과 같은 단체들과 일하는 동안에 DRA는 난민 등록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수가 극도로 빈곤한 지역민들 사이에서는 원조 배급품, 건강관리, 학교교육에 분개하며 다답에 대한 반발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7월에 케냐 정부는 마침내 지난 해에 완공이 되었으나 사용 허가가 나지 않았던 캄비우스 (Kambioos)와 이포 확장지역 (Ifo Extension) 2개의 새로운 공간을 사용하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각각은 의 공간은 9만 명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한 전문적인 국제 구호원은 “케냐 정부는 시간을 끌어 왔습니다. 물론 이제는 이에 대한 세상의 관심과 함께 이것에 동의해야만 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UNHCR의 목표는11월 말까지 교외에서 온 모든 사람들을 새 캠프로 이주시키는 것”이라고 Mukhwana는 말했습니다. 과잉 수용만이 시급한 일이 아닙니다. 만약 8월에 비가 온다면 이포의 모든 외곽에 홍수가 날 것입니다. 다가할리의 국경없는의사회(MSF: Medecins Sans Frontieres) 일반 병원의 책임자 Gedi Mohamed박사는 또 다른 걱정을 합니다. “사람들이 외곽에서 적절한 생활편의시설 없이 살아가는 한, 이는 매우 위험합니다. 만약 콜레라가 닥친다면 이는 대 재앙이 될 것입니다.”


저는 만약 사람들이 계속해서 국경을 넘어 온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 Mukhwana에게 물었습니다. 그는”우리는 소말리아가 정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은 더 적은 사람들이 케냐로 이주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라고 낙관적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Cassandrea Nelson이 보낸 최근 이메일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이 곳 모가디슈는 나쁜 상황에서 더 나쁜 상황으로 변했습니다. 병원은 외관상으로 지난 주에 환자 수가 두 배는 되어 보였습니다. 많은 환자들이 병원 주변 야외에서 잠을 잤습니다.) “왜냐하면 케냐는 분명히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Mukhwana는 말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저는 제 통역사 Shafi와 함께 난민들을 인터뷰했습니다. 그는 그가 하품을 하기 시작했을 때 소말리아에 대해 들었던 ‘장기적인 가뭄, 식량 부족, 물 부족, 그들이 당나귀 수레에 타고 온 것’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을 확인했습니다. 선생님과 딱 보기에도 멋진 남성이 볼 때, 이것은 눈치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일찍 일어나 기도를 했습니다. 이것은 무슬림들이 새벽부터 자정까지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을 삼가는 금식의 달 라마단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 드렸듯이, 새로 도착한 굶주린 자라 하더라도 단식 중에 있습니다. (코란에 의하면, 하루 14mile 이상을 여행한 자는 면제됩니다.)


다답에서의 생활의 주요 특징은 줄을 서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도착했을 때 시작되고, 당신은 대가족(17명의 자녀 이상), 소가족, 그리고 여성과 남성으로만 구성된 (소말리족은 분리하는 것을 선호합니다.)선으로 정렬됩니다. 오늘날 이포 접수처의 대기행렬은 이미 500명이 넘습니다.


일단 정문을 통과하고 나면, 난민들은 지문을 채취 당하고 손목 밴드를 착용하게 되며 몸무게를 재고 남은 21일 간 옥수수 가루, 소금, 잘게 찢은 노란 완두콩 한 덩어리의 긴급 배급을 받을 것입니다. (‘우선순위’라고 표시된 이들은 고 열량 비스킷을 먹기 위해 다른 대기행렬로 빠르게 줄을 서게 됩니다.) 도착한 날로부터 3주 이내에 그들은 공식적으로 난민으로 인정받고 배급품 카드를 지급받으며 그 후 일주일에 두 번 음식 배급을 받는 바깥의 등록센터에 줄을 설 것입니다.


건강한 아이의 체중을 산출하는 2a + 8 (2 X 나이 + 8)이라는 방정식이 있습니다. 병원에서 간호사는 그들의 엄마 Khadija 곁에 누워 울어보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 하는 2세 Saahara와 7개월 된 Leyla Ibrahim에게 이것을 테스트해보았습니다. Saahara는 12kg이어야 하지만 5.8kg이었습니다. Leyla Ibrahim은 9kg이 되어야 하지만 4.4kg이었습니다. 그들의 전체적인 신진대사는 무너진 상태입니다. 이는 죽음에 가까운 삶입니다.


2008년에 옥스팜(Oxfam)은 다답을 공공 보건이 심각한 상태라고 선언했습니다. 콜레라와 다른 전염병들이 의학적 보호와 위생 모두 부족해 지역에 널리 퍼졌습니다. 18년 동안 개선되지 못한 수질 시스템은 비효율적이라고 비난 받았습니다. 인권감시단체(HRW: Human Rights Watch)는 다답을 운영하는 단체를 이것이 난민캠프라기보다는 빈민가에 가깝다고 말하며 강력하게 비난했습니다.


구조 체제에 있어서 가뭄은 ‘천천히 불타는’ 위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기관들이 작년에 경고를 했음에도, 7월 초 가뭄이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여 모두에게 대처하기에는 너무 늦고 말았습니다. 피난민들의 유입은 기자, 기부 대표들, 정치인들 및 유명 인사들의 유입과 맞물렸습니다. 현재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에는 22개의 단체로부터 온 1,022명의 국제 구호원이 있습니다. 매일 아침 7시 30분, UNHCR, Norwegian Refugee Council, FilmAid, LWF, WFP 인 4x4s painted with 2ft-high initials 는 캠프로 호송을 시작하여 오후 4시 30분에 돌아옵니다.


난민medicine.png 사진 3/4다답의 다가할리 구역 교외지에 위치한 Médecins Sans Frontières 진료소의 내부


난민수용소.png 사진 4/4 다답의 이포 캠프 교외지에서는 천막이 임시 거처를 덮고 있습니다.


1992년, 당시 4세였던 아이브라힘(그의 실명이 아님)은 그의 부모님과 함께 모가디슈로부터 도망쳤습니다. 그 가족은 그들이 머지않아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으며 이포로 갔습니다. 일거리를 찾아 1998년에 모가디슈로 돌아왔다가 총에 맞아 죽은 그의 아버지를 제외한 그의 가족들은 그때부터 줄곧 여기에 있어왔습니다. 그의 아버지의 죽음 이후, 미국에 있는 아이브라힘의 삼촌은 일곱 가족을 위해 월 100달러(USD)씩을 보냈습니다. 2010년, 아이브라힘은 나이로비에 위치한 케냐 사회복지 및 지역개발 대학에서 공부를 할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현재 26세인 그는 한 기관에서 월 9,000실링을 벌며 한 가정의 가장입니다.


이곳에서 약 20년을 살아온 45세의 Anap Abdullahi Kariye 또한 세이브더칠드런(Save the Children)이 마련해준 제도 덕분에 생계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매력적이고, 순진한 얼굴을 한 7세 난 아이의 엄마인 그녀는 현재 같은 가족으로부터 온 5명의 아이들을 포함해 총 8명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노상강도들에 의해 공격을 당했고, 어머니는 아기와 같이 사라졌습니다. 아버지는 3년 전에 소말리아 무장투쟁단체에 붙잡혔습니다.” 그녀는 3개월 전 그들을 수용소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폭행을 당했고, 그들의 옷을 뺏겼습니다. 그들은 누구도 돌봐줄 사람이 없는 연약한 그 아이들은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수입 창출 프로그램을 통해 그녀는 캠프에 있는 사업가로부터 돈을 빌려 음식을 사고 시장에 팔아 그녀의 회사에 있는 다른 15세 부모들과 함께 이익을 나눕니다. “그녀는 대략 월 50달러 (USD)의 수입을 얻습니다.”라고 사회복지사가 말합니다. 캠프에 사는 가족들의 월 평균 소득은 약 250달러(USD) 이기 때문에(적은 가족들은 이보다 현저히 적습니다), 생활하기에 충분하지 않지만 그녀는 다른 기관들을 통해 원조를 받습니다.

다답에서의 일은 제한되어있습니다. 케냐 정부는 그들이 ‘정해진 캠프에서만 산다’는 것을 약속한 피난민들만 받아들입니다. 피난민들은 케냐에서 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캠프 내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시장 이자율보다 적은 보수를 받습니다.


“전쟁 지대 주변의 국가들은 언젠가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길 바라면서, 홍수처럼 밀려드는 피난민들이 수용소 한 곳에 머물기를 선호합니다.” 라고 Linda Polman은 그녀의 책 캐러번의 위기: 인도주의적 지원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The Crisis Caravan: What’s wrong with Humanity Aid?)에서 설명합니다. 그래서 피난민들은 다른 곳에서 기회를 찾습니다.


2009년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는 다답의 성인 남성들과 소년들이 소말리아에 대적하기 위해 과도연방정부와 소말리아 무장투쟁단체(al-Shabaad) 두 곳 모두로부터 징집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밝혔습니다. 과도연방정부 지원자들은 훈련에 400-600달러(USD)의 초기 수입을 약속 받고, 그 후 소말리아에 배치되면서 관대한 월급을 받습니다. “캠프 내에 피난민들의 지원을 허용하는 것은 분쟁으로부터의 도피처라는 캠프의 본 목적을 훼손하는 것입니다.”라고 휴먼라이츠워치의 아프리카 담당 Georgette Gagnon이 말했습니다.


“캠프 안에서 다른 할 일 없이 있는 것은 좌절과 분노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라고 Polman은 말합니다. “아프카니스탄의 탈레반의 운동을 예로 보았을 때, 이는 파키스탄의 피난민 캠프에서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다답은 ’당신은 사라지지 않는 인도주의적 긴급상황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은 정치적인 딜레마를 일으켰다고 케냐의 세이브더칠드런(Save the Children) 프로그램 담당 Catherine Fitzgibbon이 인정했습니다. “인도주의 관료들은 학교나 병원이 피난민들을 보호하는 최적의 장소라 말하지만, 기부자들은 더 많은 피난민들이 와서 머물 것을 장려하는 재정 정책을 꺼려합니다.”


“그러나 교육받은 사람들은 스스로의 길을 찾기 때문에 교육은 피난민들에게 실질적으로 장기적 해답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세이브더칠드런(Save the Children)은 다답에 지역주민과 피난민들을 위한 교육자 양성 시설을 운영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늦은 오후, 저는 이포 변두리의 Sarura의 집 근처에서 거꾸로 놓인 양동이에 앉아있는 그녀를 만났습니다. 피난민 캠프에서의 집은 플라스틱 시트에 막대를 꽂은 원형 천막입니다. 그녀는 병들었습니다. 그녀의 가녀린 몸은 연약해 보이고, 그녀의 목소리는 제대로 나오지도 않습니다. 폭풍이 오고 있습니다. 당신은 거센 바람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무엇을 해왔나요? 아무것도요, 그녀는 앉아서 말합니다. 그녀는 이곳에서 전보다 행복한가요? 그녀는 누군가로부터 먹을 것을 달라며 우는 아기를 건네 받자 매우 힘 없이 미소를 띱니다. “이 곳 외에 제가 갈 곳이 어디 있나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 말합니다. “저는 소말리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개인 도구
이름공간
변수
행위
둘러보기
지구촌 빈곤문제 주제들
도구모음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