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국가들의 외채 탕감을 위한 주빌리 2000 캠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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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David Roodman

출처 : http://bit.ly/13Ltm9W


주빌리2000(Jubilee 2000) 캠페인은 빈곤국가들이 짊어진 부채를 탕감하자는 캠페인으로서, 1990년대 후반과 2000년에 걸쳐 정점에 도달한 후 2000년에 무사히 종료됐습니다. 주빌리2000은 몇 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국제적, 비정부적 운동으로 발돋움 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현재 주빌리2000의 결과와 교훈을 이해하기 위해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를 한발 더 진척시키기 위해 작성됐습니다. 따라서 이 보고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주빌리2000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간략한 평가를 제공할 것입니다.

목차

Leaf.JPG주빌리2000의 역사적 맥락

빈곤국가들의 국가 대외부채(sovereign external debt)를 탕감해주자는 주빌리2000은 2000년경에 시작된 것도, 끝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빌리2000은 빈곤국가의 부채탕감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거쳐간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가 3년 동안 지속된 글로벌 부채위기(global debt crisis)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던 1985년, 미국의 세속단체와 종교단체들은 공공, 민간 채권자들이 빈곤국가의 외채를 탕감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며 부채위기네트워크(Debt Crisis Network)를 설립했습니다. 또한 1986년 영국의 옥스팸(Oxfam : Oxford Committee for Famine Relief)은 “1985년 아프리카에 1파운드(GBP)만큼 기근을 완화 해줄 때마다 서구국가들은 2파운드(GBP)의 부채 상환(debt payments)을 받아갔다”는 메시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 강력한 국가적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 주빌리2000은 이미 공식적으로 종료됐지만,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들의 외채를 경감해주려는 계획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최소 2000년까지 빈곤국가들의 부채를 탕감하기 위한 글로벌 캠페인은 영국의 압도적인 주도를 기반으로 진행됐습니다. 1986년 Oxfam이 추진한 부채위기 인식개선 캠페인의 영향을 받은 영국 정부는 서방 7개 선진공업국가들로 구성된 G7에서 외채 경감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영국의 지지는 1996년에 이르러 세계은행(World Bank)과 국제통화기금(IMF : International Monetary Fund)이 외채과다빈곤국들을 위한 외채경감계획(Debt Initiative for HIPCs: Debt Initiative for Heavily Indebted Poor Countries)을 추진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HIPC외채경감계획은 최빈곤국들의 부채 문제 해결을 위해 채권국들이 주도해 만든 최초의 계획입니다. 게다가 주빌리2000을 구약성서(Old Testament)의 “주기적 용서의 규범”, “기한이 정해져 있는 해방의 규범”과 밀접히 연관시키는 발상을 고안한 것도 영국이었습니다.

Leaf.JPG수렁으로 빠져들어간 위기

주빌리2000이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는 글로벌 부채 위기와 같은 맥락에 있는 한편, 이와는 별개이기도 했습니다. 1982년 개발도상국들을 중심으로 발생한 신용 버블(credit bubble)은 크게 2개의 그룹에서 나타났습니다. 먼저 첫 번째 그룹은 당시 부유했던 개발도상국, 즉 멕시코나 브라질과 같은 중진국(MIC: middle-income countries)들입니다. 당시 중진국들은 신용도가 비교적 높다고 알려져 있었으며, 일본이나 서구의 상업은행들도 중진국들을 신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한편 두 번째 그룹은 사하 라사막 이남 아프리카(Sub-Saharan Africa)의 대부분의 국가에 해당하는 저소득국가(low-income countries)들인데, 당시 이러한 저소득국가들도 신용 버블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외채과다빈곤국(HIPCs: Heavily Indebted Poor Countries)이라고 분류된 국가들이 1982년 원리금 상환액(debt service), 즉 원금과 이자를 합한 금액 중 절반을 민간 채권자들에게 지불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신용 버블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신용 버블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정부와 IMF를 포함하는 국제기구들은 HIPC들이 개인은행(private banks)들에게 빌린 돈을 갚을 수 있도록 더 많은 자금을 대출해줬습니다. 그 결과 정부와 국제기구들은 세계 최빈곤국들의 공적 채권자(official creditors)가 되어 빈곤국가의 부채포트폴리오(debt portfolio)를 지배하게 됩니다. 부유한 정부가 채권자가 되고, 가난한 정부가 채무자가 되는 이러한 관계는 국제대출(international lending)의 긴 역사 상 유일무이한 경우였습니다.


*외채경감계획(Debt Initiative for HIPCs : Debt Initiative for Heavily Indebted Poor Countries):외채가 과다한 빈곤국의 채무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IMF와 세계은행이 시행하는 전략입니다.

*중진국(MIC: middle-income countries) : 국민 소득이나 사회 보장 제도, 경제 발전 따위의 면에서 선진국과 후진국의 중간에 속하는 나라입니다.


이처럼 IMF, 세계은행 등의 공적 기관들이 다자간대출기관(multilateral lenders)으로서 HIPC의 주요한 채권자가 되는 추세가 증가하자, 비정부기구(NGO : Non-Governmental Organization)와 공적 기관 간의 운명적인 충돌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IMF, 세계은행과 NGO 간의 마찰은 유독 격렬했습니다. 1980년과 1990년에 걸쳐 다자간 대출기관은 양자간 대출기관(각 국가의 정부를 지칭합니다)과 맞먹는 빈곤국가의 채권자가 됐습니다. 당시 양자간 대출기관들은 부채를 탕감하고 보조금을 제공하는 형태로 빈곤국들을 지원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다자간 대출기관들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기관의 주주로 있는 국가들의 동의가 없이는 보조금을 제공할 수 없었으며, 주주의 권리를 가진 모든 국가들이 빈곤국가에게 제공하는 보조금에 대해 합의를 이루기는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스스로의 재정 자립을 중요하게 여기고, 과거에 저지른 실수들에 대해 입법기관들이 던지는 회의적인 시선과 곤란한 질문들이 두려웠던 다자간 대출기관들은 역사적으로 다자간 대출기관의 융자잔고(outstanding loans)가 적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모두 상환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주장하곤 했습니다. 글로벌 부채 위기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당면한 현실과 어긋나는 다자간 대출기관의 부정은 계속됐습 니다. 결국 1990년대에 이르러 다자간 대출기관은 도덕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NGO와의 충돌을 빚게 됩니다.


또한 공적 부채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을 만큼 너무나도 많은, 불필요한 시간이 소요됐습니다. 지난 200년 동안 주요한 국제적 부채 위기들은 약 50년마다 한 번씩 발생했습니다. 부채 위기가 닥쳤을 때 채권자와 채무자가 타협에 이르는 데에는 일반적으로 9년이 걸립니다. 가령 1달러(USD)의 융자잔고 당 0.5달러(USD)의 상환을 약속하는 등의 외채경감에 관한 협상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채권자와 채무자의 합의를 거친 후에야 정상적인 대출의 흐름을 복구할 수 있습니다. 한편 상업은행과 중진국들이 타협을 하는 데에는 7년이 조금 넘게 걸렸습니다(1989년에 발표된 브래디플랜(Brady plan)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HIPC 부채 위기를 해결하는 데에는 약 28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라이베리아(Liberia)와 콩고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의 경우 2010년 중반에 접어들어서야 겨우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Leaf.JPG채권자들은 왜 신속히 대응하지 않았던 걸까요?

공적 부채 위기가 오랜 시간 지체됐던 첫 번째 원인은 바로 공적 부채 위기가 상업은행 채무 위기(commercial debt crisis)와 역사적으로 결합되면서 각 위기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마는 정도까지는 심각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정부나 세계은행과 같은 주요 채권자들의 지급능력(solvency)은 어떠한 위험에도 처한 적이 없었던 반면 채무자들의 상황은 달랐습니다. 일부 채무자들은 부채 위기가 발생하기 전에 빌린 원금의 이자조차 갚지 못해 해외로부터 유입되는 보조금, 대출자금의 갑작스러운 중단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채무자들은 채권국가들이 발족한 공식 조직인 파리클럽(Paris Club)에 여러 차례 찾아가 단기부채의 상환기간을 재조정하고 불어나는 부채를 줄여보기 위해 협상을 시도하거나, 오래된 부채를 갚기 위해 새로 대출을 받았습니다.


공적 부채 위기를 지체시킨 또 다른 원인은 바로 채무자들의 무력함입니다. 북반구의 선진국, NGO, 국제기관 등의 손에 대부분의 의사결정권을 넘겨준 나머지 채무자들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만 것입니다.


위기라고 확신하기에는 어중간했던 상황들과 채권자들이 지닌 비대한 권력은 상황을 악화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채권자들 사이에서 대출자금을 회수 받지 못 할거라는 예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추세가 크게 확산됐습니다. 그러나 채권자들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1988년부터 새로운 외채경감계획을 마련하기 위해 G7정상회담(G7 summits)이 정기적으로 개최됐습니다. 그러나 G7정상회담에서 논의된 방안들이 얼마나 비현실적이었는지는 1988년 이후에 열린 회담들에서 뒤늦게 밝혀졌습니다. 1988년부터 2005년 전까지 추진된 초기의 외채경감계획들은 HIPC 부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영구적인 해결책을 제공하겠다고 자신 있게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호언장담도 2005년에 다자간외채경감계획(MDRI: Multilateral Debt Relief Initiative)을 발표하기 전까지만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G7정상회담에 제시한 최초의 외채경감계획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현실적이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먼저 HIPC의 부채를 90%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까지만 탕감해준다는 방안은 언뜻 보면 무척 실용적으로 보입니다. 부채를 면제해주겠다고 약속한 이상 절대 회수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조치는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다자간 개발은행(multilateral development banks)의 “상환”을 도왔다는 점에서 아주 유용했습니다. 한편 IMF는 “금을 판매”해 부채 탕감에 필요한 “지불”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IMF의 대처는 금을 파는 시늉만 하고 실제로는 판매하지 않았던 눈속임 거래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부채탕감조건(정책 개혁을 약속하고 그 대가로 자금을 제공받는 것)이 엄격하지 않았던 반면, 초기 외채경감계획은 채무국들이 시민사회와 협의해 빈곤을 완화하기 위한 예산을 책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경제정책까지 바꿀 것을 요구했습니다. 최근 국가와 시민사회가 함께 논의하는 정치 과정에서 과거보다 훨씬 뜨거운 논란들이 일어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빈곤에 대해 국가가 시민사회가 협의해야 한다는 조건은 효과적인 경제 정책을 개발하는 데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브래디플랜(Brady plan) : 1989년 3월 미국의 브래디 재무장관이 발표한 개발도상국의 채무 구제방안입니다. 이 방안은 종전의 베이커 플랜이 채무개도국의 경제성장과 이를 통한 외채 상환능력의 확충을 위해 신규차관 공여에 중점을 둔 것과는 대조적으로 채무개도국의 외채원리금을 삭감할 것을 주장함과 아울러 IMF 및 세계은행 등의 역할제고를 호소하였습니다.

*파리클럽(Paris Club) : 주로 OECD 회원국으로 구성된 포럼으로 대출금 상환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채무국과 채권국을 한 자리에서 만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채무기한 연장 및 기타 다른 제도적 장치를 통하여 채무불이행 방지를 추구합니다.


Leaf.JPG채권자들이 결국 움직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러나 채권자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부채를 탕감해줘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채권자들이 외채경감을 피할 수 없었던 원인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먼저 첫 번째 이유는 도덕성에 있습니다. 부유한 채권자들이 가난한 채권자들에게서 돈을 받는 상황은 도덕성에 어긋난다는 인식 때문에 선뜻 부채를 상환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거지의 구걸을 거절하는 일보다 거지에게서 돈을 빼앗는 게 더 나쁘다고 여기는 인식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태만과 과실은 결국 똑같은 결과를 초래하기 마련입니다. 부채 로비스트들의 영향력과 종교적 공명이 발생하는 근원지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직관에 발생하는 불균형에 있었습니다. 다자간 대출기관에서 일하는 공직자들도 비공식적으로 부채탕감을 반대하는 것이 공식적으로 항의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됐습니다. 가난한 국가들의 부족한 자금을 모두 흡수해 채권자들의 부유함을 유지한다는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적인 주장에 의존한 채권자들의 조치는 대단히 부적절하며 부끄럽기까지 한 것이었습니다.


부채탕감을 촉진했던 두 번째 원인은 역설적이게도 당시 HIPC들이 부채를 갚지 않았고, 갚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1980년대 후반까지 HIPC라고 구분된 대부분의 국가들은 사하라 사막 이남에 위치해 있었으며, 당시 원리금 상환액의 약 40%까지 밖에 지불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나머지 60% 가량의 부채는 파리클럽에서 면제되거나 상환 기간이 연장됐으며, 체납금을 남기는 조건으로 상환이 유예됐습니다. 그 무렵 HIPC는 파산한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채권국의 재무부 관리들은 금전적 정직성(financial probity)을 꾸준히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곤 했으나, 이러한 자부심도 곧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 역시 돌려받을 수 없는 부채는 포기해야 한다고 결론짓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Leaf.JPG다자간 대출기관과 NGO는 부채탕감의 비용/가치를 과장했습니다.

다자간 대출기관과 NGO이 벌인 언쟁 속에는 그들이 깨닫지 못한 아이러니가 있었습니다. 다자간 대출기관과 NGO 모두 각자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허구로 만든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NGO는 부채를 탕감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의 가치를 과장했습니다. NGO는 외채경감의 가치가 수십억 달러(USD)에 이르며, 빈곤층을 위해서 학교와 병원들을 지을 수 있을 정도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자간 대출기관도 부채탕감 비용이 실제 필요한 액수보다 더 많다고 부풀렸습니다. 다자간 대출기관은 외채경감에 필요한 자금의 규모를 강조하기 위해 NGO의 논거를 그대로 빌려왔습니다. 이러한 다자간 대출기관과 NGO의 역설적인 논쟁은 정작 실용적인 관점에서 분석한 파산(bankruptsy)의 영향력을 공공연하게 경시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파산에 따른 부채탕감은 다자간 대출기관의 주장처럼 값비싼 대가를 필요로 하지도 않았고, NGO의 주장처럼 막대한 가치가 있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NGO와 다자간 대출기관 모두 외채경감을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닙니다. NGO와 다자간 대출기관은 외채경감과 더불어 새로운 원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대출자(lenders)들에게 공식적으로 유입되는 자금이 줄어들더라도, 그들로부터 유출되는 자금의 수준을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원조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재정 지원이 시행될 경우, 부채를 탕감하는 데에 더 큰 비용이 들 뿐만 아니라 사회적 비용도 함께 늘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부채 탕감과 원조를 병행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원조에 대한 이와 같은 부정적 평가는 잘못된 것입니다. 1996년과 1999년에 걸쳐 두 차례 고안된 외채경감계획(당시 주류 NGO들은 외채경감계획의 적절한 단계에 개입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을 기반으로 일부 기부국가들이 모여 신탁기금(trust fund)을 운영했습니다. 이 신탁기금은 다자간 개발은행들이 채무자들의 부채를 탕감해 준 만큼의 액수를 보상해줬습니다(IMF는 제외). 그 결과 다자간 대출기관들은 원리금 상환액을 회수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음에도, 대출자금을 부채를 면제하기 전과 동일한 수준에서 유출할 수 있었습니다. 주빌리2000은 한 발 더 나아가 새로운 원조가 빈곤을 완화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사회적 지출(보건, 건강 등)에 투입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주권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모든 외부의 행위자들에게 겸손해지라고 충고합니다. 부채가 빠르게 경감되기를 바라는 대중의 압력에 의해 기부자들이 제시하는 원조수혜조건들이 약화될 경우, 기부조건들이 충족되든 그렇지 않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해관계와 부패를 극복하기 어려워집니다. 한편 다자간 대출기관들도 새로운 자금의 유입으로 인해 발생하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과거의 실수들, 더 정확하게는 지속불가능한 대출을 야기했던 조치들을 만회하기 위해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결국 다자간 대출기관들은 부채 조기탕감과 원조 제공의 속도를 맞추기 위해 원조를 제한했으나, 부채 역시 조기탕감 속도에 발맞춰 함께 불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Leaf.JPG시간에 따른 도덕적 비일관성(Moral Time Inconsistency, 개발을 위한 대출)이 가난한 국가들에게 불행을 가져다 주고 있는 걸까요?

그러나 온갖 혼란 섞인 기대 속에서도 외채경감 캠페인은 가장 근본적인 목표를 이루었고, 찬사를 받아 마땅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HIPC들의 부채가 탕감됐던 것입니다. 1999년에 개정된 외채경감계획은 주빌리2000에서 영감을 받아 결국 주빌리2000을 이끄는 중심이 됐는데, 이 계획을 기반으로 HIPC의 부채 중 절반 가량이 탕감됐습니다. 비록 주빌리2000이 목표로 했던 액수에는 훨씬 못 미치는데다 현실적으로 부채 위기를 해결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지만 장족의 발전이라 칭하기 충분했습니다. G7에 이어 등장한 여러 기관들의 외채경감 캠페인은 2005년 스코틀랜드(Scotland)의 글렌이글스(Gleneagles)에서 개최된 G7정상회담에서 다자간외채경감계획을 이끌어내는 데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다자간외채경감계획은 수많은 HIPC의 다자간 부채(multilateral debt)를 면제하고 대출한도(보조금과는 별개로 제공됨)를 증가시키고자 했습니다. 결국 주빌리2000을 포함하는 외채탕감 운동들은 개혁을 성취하는 데에 부푼 기대를 품고 있던 압력단체(pressure groups)들의 모습을 잘 보여줬던 흥미로운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현실주의가 현실주의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입니다. 지난 20년 동안 꾸준히 지속됐던 압력단체들의 압박이 없었더라면 지금까지 탕감된 부채의 규모는 실제로 달성했던 수 준보다 훨씬 적었을 지도 모릅니다.


결과적으로 NGO는 막대한 규모의 부채를 탕감시키는 데에 의미 있는 기여를 했습니다. 외채경감에서 NGO가 거둔 성공은 1940년부터 시작된 해외원조의 역사 속에서 아직까지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원조의 흐름을 이끄는 힘은 빈곤국들의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발생합니다. 바꿔말하면 지구촌 사회(global society)의 통합이 진전되면서 원조에서 도덕성을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으며, 그 결과 제 3세계가 선진국들과 점차 가까워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다자간 대출기관들도 도덕적인 원조를 중심으로 보다 제도적이고 영구적인 원조를 제공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유럽의) 부흥은행(Bank for Reconstruction)으로서 최초로 고안된 기관은 “개발”이라는 단어까지 덧붙여진 후에야 비로소 기관의 명칭이 완성됐습니다. 부흥은행으로서의 역할을 넘어 장기적인 임무까지 수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944년 공식적으로 설립된 이 기관이 바로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입니다. 당시에는 비공식적으로 세계은행이라고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IBRD는 시장 이자율에 근거해 대출을 제공했습니다. 빈곤국들에게 주어지는 특혜(낮은 이자율)은 1950년 말에 처음 도입됐습니다. 이 제도를 최초로 시행한 기관은 미주개발은행(Inter-American Development Bank)이었으며 세계은행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IMF가 국제금본위제(international gold standard)를 이끌겠다던 본래의 목적을 잃었으나, 오일쇼크(oil shocks)의 여파로 뒤흔들리던 개발도상국들에게 자금을 대출해줘야 한다는 새로운 목적을 곧 찾게 됩니다. 또한 1980년대 IMF는 대규모 대출 특혜 프로그램인 확대구조조정금융제도(ESAF : Enhanced Structural Adjustment Facility)를 시행했습니다. 1982년 상업은행들에게 채무 위기가 닥치자 양자간 기부자(bilateral donors)들은 기존에 유지하던 수준보다 훨씬 많은 대출자금을 보조금으로 전환해 빈곤국가들에게 제공했습니다. 2000년대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에 공급되는 원조가기존의 3배 가량 늘었습니다. 게다가 세계은행도 빈곤국가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부채탕감이 소급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다수의 대출이 특혜를 받았고 나머지는 보조금으로 바뀌었습니다. 2010년 역사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대출자였던 IMF는 아이티(Haiti)에 지진이 발생하자 새로운 규칙들을 적용시킨 메이저론(major loan)을 구성해 아이티에 제공했습니다. IMF가 아이티에 제공한 새로운 형태의 대출은 재난으로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는 국가들의 부채를 면제하고 대출을 보조금으로 바꿔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됐습니다.


재정 조건은 갈수록 완화되고 있으며 부채탕감 조건은 거의 관례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최근의 추세를 감안해보면,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사람들이 개발을 지원하기 위한 대출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으면서도 이 발상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사람들은 빈곤에서 벗어나는 데에 실패한 국가들이 갚지 못한 원리금을 되돌려 받는다는 게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얼마나 어려울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빈곤국들이 이자를 갚는 데에 쓰는 돈보다 더 많은 보조금과 대출을 받고 있었는데도 대출국들이 원리금을 돌려받기는 힘들었습니다. 이처럼 가난한 국가들에게 제공된 개발대출(development lending)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도덕적, 정치적인 비일관성(time inconsistency)으로 괴로워했다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대출이 국가의 부를 증진시킬 수 있는가, 혹은 제공된 보조금보다 더 많은 국가의 부를 창출시킬 수 있는가를 둘러 싼 논쟁은 주빌리2000 이후 채무계약이 부채 상환을 강요하지 못하도록 작성되는 데에 효과적으로 기여했습니다.


도덕적 시간의 불일치가 야기한 결과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제기했습니다. 가난한 국가들에게 제공되는 특혜성 대출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개발대출을 중단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개발대출은 폐지될 위기에 처해있는 걸까요? 최소한 국제 기부 사회는 부채탕감을 제도로 확립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대출자들이 경제적 실패에 따른 위험을 공유하기 시작하면서, 가난한 국가에게 대출금은 자산의 일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빈곤국들에게 특혜성 대출을 제공하는 방안을 공식화 하는 것이 부채 위기에서 벗어나는 데에 보다 효과적일 것입니다.


*신탁기금(trust fund) : IMF의 킹스턴협약에 의하여 설립된 기금으로 저소득 개발도상국의 국제수지를 지원하기 위한 특별신용제도입니다.

*확대구조조정금융제도(ESAF : Enhanced Structural Adjustment Facility) : 저개발국의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 및 외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IMF가 시행하는 금융지원방식입니다.

Leaf.JPGNGO가 미친 영향들

주빌리2000 캠페인은 NGO의 부활이라는 중요한 국면을 형성하는 데에 일조했습니다. 비정부적 집단들은 국민들을 교육시키고 정책결정 과정에 국민들을 참여시킴으로써 스스로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주빌리2000이 성공을 거두자 2000년대에 세간의 이목을 끄는 새로운 NGO들이 창설됐습니다. 데이터(DATA: debts, AIDs, Trade, Africa)와 원 캠페인(ONE Campaign)은 그 좋은 예시들로서 현재는 두 기관이 합병된 상태입니다. 이처럼 주빌리2000의 영향을 받아 새로 등장한 NGO들은 아일랜드의 가수 Bono와 같은 유명인들의 영향력을 활용하는 등 지지 방식을 한층 진보시켰습니다. 이는 신식, 구식 미디어와 지식을 동시에 이용한 것인데, 중도주의적 태도를 지닌 사람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미국 양당 정치 기준). 무엇보다도 주빌리2000의 비전을 이어 받은 후계자들은 미국 정부가 아프리카 HIV/AIDS 치료를 중심으로 글로벌 건강의 증진을 위해 약 500억 달러(USD)의 지원을 제공하게 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재정 지원이 촉진되면 부채탕감에 필요한 자금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점은 약점이 되기도 합니다. NGO 캠페인의 영향력은 캠페인에 대한 항의가 적을 때 극대화되는데, 기본적으로 NGO의 캠페인은 일반납세자(general taxpayer)들에 의해 충당된 원조자금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원조 정책은 무역 정책과 상반되는 것이 일반적이라 무역정책을 지지하는 반대세력이 견고할 경우 Oxfam과 같은 NGO들의 영향력은 줄어들고 맙니다. NGO 캠페인이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또 다른 순간은 바로 변화를 필요로 하는 현실이 종교적, 정치적 인구통계학(demographics)으로 정제되어 단순한 아이디어로 나타날 때 입니다. “1985년 우리가 아프리카의 기근 완화(famine relief)를 위해 1파운드(GBP)를 제공할 때 마다 서구사회는 2파운드(GBP)의 부채상환을 받아갔다”는 등의 인구통계학적 메시지는 이에 해당하는 좋은 예시입니다. 지금 당장 치료제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AIDS로 죽어갈 것입니다. 불행히도 “팔아야 하는 것”과 필요로 하는 것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AIDS 치료에 필요한 기금은 AIDS 예방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자금과 맞먹으며, AIDS 이외의 질병 퇴치 운동을 추진하는 비용과도 동일합니다. 일반적으로 AIDS 예방 프로그램은 동일한 비용 대비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으며, 질병 퇴치 운동은 세간의 이목을 끄는 데에 효과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NGO가 캠페인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어려운 과정을 거치는 만큼 NGO 캠페인의 영향력 역시 막강하다는 사실을 주빌리2000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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